파조(派祖) 휘: 은(垠) 진사공(進士公)은 이조(李朝) 세종조(世宗朝)의 명신(名臣)이요 수선 청백리(首選淸白吏)이신 휘: 만리공(諱:萬理公)의 아드님 오형제(五兄弟)중 넷째 분으로써 세종(世宗)19년 정사(丁巳) 1437년 8월 10일에 출생하여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시고 어려운 가운데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세조(世祖)5년 기묘(己卯) 1459년에 진사(進士)가 되시고 문장학행(文章學行)으로 후진(後進)을 교도(敎導)하는등 세간(世間)에 명성(名聲)을 떨쳤고 성종(成宗) 24년 계축(癸丑) 1493년 3월 26일에 졸(卒)하여 증 통훈대부 예조좌랑(贈通訓大夫禮曹佐郞)이 되셨으며 묘(墓)는 안성불지(安城佛智) 선고(先考) 부제학공 (副堤學公) 묘(墓)의 우록(右麓)에 丑坐로 모시고 이조판서 윤세걸(吏曹判書 尹世傑)이 비문(碑文)을 지었다. 배(配)는 상주김씨(尙州金氏) 참찬(參贊) 선(宣)의 따님이며 할아버지는 판관(判官) 석(碩)이고 증조부는 중서령 평장사 영인 부원군 문열공(中書令平章事寧仁副院君 文烈公) 원근(元謹)이며 기일(忌日)은 10월 10일이다 묘(墓)는 쌍봉으로 하였으나 오랜세월로 인하여 묘분이 허약하여 진사공파 종친회(進士公派 宗親會)에서 1997년 정축(丁丑) 11월 29일 합봉(合封)하고 비석(碑石)등 석물(石物)을 갖추어 축좌(丑坐)로 모셨다.
최광대
조선 초에는 문과(文科:大科)의 예비시험인 소과(小科)에 생원시(生員試)만 실시해 오다가, 1438년(세종 20) 진사시도 설치, 문예(文藝:詩 ·賦 ·頌 ·策)로써 시험하여 합격한 100명에게 진사의 칭호와 백패(白牌:합격증)를 주고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주었다. 이들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 급제하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이 정도였다. 한편,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참봉 ·훈도 ·오위장 등 종9품직을 제수받는 경우도 있었다.